크로아티아_C R O A T I A

2020. 12. 16. 14:14DESTINATION

 

 

 

그날 아침,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잔 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린 뒤 쌀쌀해진 이스탄불의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여행의 지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부터 머리가 띵하게 울리고 목이 아파 왔다. 아무래도 감기가 걸린 모양이다. 어제와는 달리 콧물을 훌쩍거리는 빈도도 높아져만 가고 여행이 길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씩 지쳐만 가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감기약이라도 사기 위해 술탄 아흐멧 주변의 약국에 들렀으나 기분만 상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많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라고 말하거나, 이상한 약품을 한 움큼 내주며 비싼 가격을 부르는 식이다. 이럴 땐 한국에서 가져온 테라플루가 딱인데, 동이 난지 이미 오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사왔을 것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법.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 건너편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러 나의 증상을 설명하니, 상점 주인은 타이롤핫이라고 이름 붙은 테라플루와 비슷한 발포 감기약을 내어준다. ‘타이롤핫(TYLOLHOT)’이라 불리는 이 녀석은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이 가능해 병원이나 약국을 경계하는 나 같은 외국인 여행자에겐 사막 위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어 준다. 진통, 해열제의 일종인 파라세타몰과 콧물 흘림을 멈추도록 도와주는 항히스타민이 주성분이니, 이정도 감기쯤이야 금방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차이(Chai)가 지겨워졌나 보군.” 

매일 아침, 커피와 차이를 대령해 주던 호텔 직원이 차이 대신 타이롤핫을 마시는 나를 보고 한 마디 던진다. 아침 식사를 파라세타몰과 항히스타민이 섞인 타이롤핫 감기약으로 대신하고 나니, 무거웠던 머리와 콧물, 목의 따가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불필요한 짐을 분산시키기로 하고 몇 개는 호텔에 맡긴 채, 트렁크와 배낭 하나, 노트북, 카메라 정도만 챙겨 서둘러 로비로 나왔다. 여권과 항공권, 신용카드와 현금 등은 꺼내기 쉽게 가방 앞에 넣었다. 지난밤, 호텔 근처 뒷골목에 위치한 여행사에 들러 저렴한 가격에 공항까지 갈 수 있는 미니밴도 예약해 두었다. 무거운 트렁크와 배낭을 멘 채 이른 아침부터 붐비는 이스탄불의 트램과 지하철을 탈 자신도 없을뿐더러 술탄 아흐멧의 가파른 언덕도, 유난히도 불규칙한 보도블럭의 덜컹거림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텔을 출발한 미니밴은 벌써 한 시간째 술탄 아흐멧 근처를 맴돌며 호텔들을 들락거린다. 놀랄 일도 아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미니밴에 채울 수 있는 여행자는 죄다 채우고 있다. 콩나물시루처럼 시끌벅적해진 미니밴, 기분이 좋아진 기사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온다. 아마도 내가 묶고 있던 호텔이 픽업 여정의 첫 시작이었나 보다. 덕분에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 시간 째 술탄 아흐멧 주변을 돌고 있지만,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통쾌하고 좋았다.

 

크고 작은 트렁크와 배낭들이 차량 안으로 하나둘 쌓이고 문조차 닫기 힘들어졌을 무렵, 그제서야 미니밴은 푸른빛의 술탄 아흐멧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차 창문을 열어 매캐한 바깥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운전하는 내내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느라 작은 레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운전기사와 흘러나오는 터키 음악에 심취해 목청을 높여 노래를 거드는 보조 기사. 둘은 여행자들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참다못해 가방 속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아 보지만 아쉽게도 큰 효과가 없다.

 

 

참고로 이스탄불에서 나의 이어폰은 음악을 듣는 용도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소음을 막기 위한 도구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운전기사의 목청이 커질수록 이어폰 속 '투애니원'의 목소리도 함께 커져간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스탄불의 풍경을 감상하며 다소 이른 시간에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발권을 마치고 라운지에서 잠시 숨을 돌려본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할 비행기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도착할 예정이고, 이후 나는 야간 버스를 타고 스플릿으로 직행할 계획이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바클라바(Baklava)를 흡입하며 출발을 기다린다.

 

실로 오랜만에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 비행기를 타 본다. 늦은 밤 어두운 활주로의 조명은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붉은 체크무늬를 정확히 비추고 있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이 점퍼에 맺힌다.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비행기에 탑승한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저녁 8시 15분, OU351 편 항공기는 1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목적지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로 날아올랐다. 비행기는 연신 굉음을 뿜어내며 하늘을 날아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간략하게 들려온다. 감기약과 잠에 취해, 반쯤 나간 정신을 바로잡고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장으로 이동한다. 마지막까지 문을 연 환전소를 찾아 난생 처음 보는 크로아티아 화폐 쿠나(Kuna)로 환전을 한다. 밤 10시 20분을 조금 넘긴 시각, 자그레브 역시 비가 내린다.

 

 

 

지형학적으로 알프스 산맥과 판노니안 평원을 끼고 있으며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 나는 이곳을 '크로아티아'라 부르고,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곳을 ‘Hrvatska’라 쓰고 ‘흐르바츠카’라 이야기한다.

국토 면적은 56,542km2로 남한 면적의 절반 정도. 인구는 440만 명 남짓. 국토는 작지만 5,835km의 해안선과 1,244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어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최고의 해양 강국으로도 통한다. '아드리아 해'는 지중해 북부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를 거치는 총 길이 800km의 좁고 긴 해역을 의미한다. 크로아티아와 인접한 해역의 경우, 유난히도 굴곡이 심한 해안 층 때문에 갈에슨잭 섬과 같은 독특한 형태의 섬이 많이 발달했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늘어진 서남부 해안의 고즈넉한 도시들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전 세계 여행자와 관광객들에게 꼭 한번 가보아야 할 관광명소로 칭송받는다. 사람들은 이곳을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도 칭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름깨나 알려진 유럽의 여느 국가와는 달리, 부족한 정보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발칸 반도의 특성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다. 그럼에도 크로아티아 여행을 결심한 이유는 낯섦음을 익숙함으로 바꾸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 때문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설렘과 분함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머리와 가슴에 요동친다. 한 가지도 녹록한 게 없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 여행 정보 사이트에 의존해야만 한다. 웹 서핑을 하며 길을 잃기도 여러 번,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마냥, ‘꼭 가보아야 하는 곳’, ‘꼭 먹어야 하는 것’, ‘꼭 해야 하는 것’ 들이 하루하루 늘어만 간다. 그 결과 긴 한숨과 짜증 썩인 육두문자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길 수차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으로 마무리됐다.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의외로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항공권은 직항이 없는 관계로 터키항공을 타고 경유하는 것으로, 지역은 크게 3곳(자그레브, 스플릿, 두브로브니크). 흐바르 섬은 현지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숙소는 다행히 비수기인 관계로 생각보다 저렴하고 여유가 있어 첫 번째 도착지인 스플릿만 예약을 확정하고 나머지 예약은 현지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크로아티아 여행이었다.

 

 

 

 

크로아티아의 첫 여행지는 1,700년을 이어온 달마티아의 도시이자 로마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AD 245~313)가 자신의 남은 여생을 보냈던, ‘꽃보다 누나’의 이승기와 여배우들이 선택했던 바로 그곳, 스플릿. 사실, 1년 전 이곳을 찾을 무렵에는 이곳이 이토록 유명해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달마티아'란 아드리아 해를 관통하는 지역으로 현재 크로아티아의 자다르, 시베니크크닌, 스플릿, 두브로브니크 등이 해당한다. 과거 로마 제국의 속주였으며 달마시안 견종의 기원이 된 지방으로도 유명하다.

 

스플릿은 자그레브에서 약 400km 떨어진 서남부 해안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이다. 아름다운 항을 따라 형성된 구시가지와 노천카페로 유명한 리바 거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디오크레티아누스 궁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시가지의 상징인 이 궁전은 현존하는 로마 유적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그 의미가 특별하고, 지중해의 쪽빛 바다를 품고 있는 궁전의 내부는 중세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다채로운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다. 물론 발음하기조차 힘든 유적들과 쉽지 않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지만 정답을 맞추어야 하는 시험이 아니니, 다행이다!

 

 

중세 로마시대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의 안쪽에는 주피터 궁전, 디오클레티아누스묘의 흔적, 열주 광장 등이 남아있는데 본래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들은 소소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와 숙소, 레스토랑, 부티크숍으로 변신하여 크로아티아 관광산업에 일조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궁전을 비롯한 성곽 내외부의 유적들(대성당, 열주 광장, 고고학 박물관 등)이나 갤러리를 관람하거나, 미로 같은 골목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은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골목 곳곳을 미꾸라지처럼 쏘다니기도 한다. 여행 일정이 여유 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너무 느긋해지는 스플릿의 일상이 조금 걱정된다. 그런들 어떠하리! 잠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마음으로 돌아가, 스플릿을 둘러보기로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주일...

 

 

궁전의 동문(East Gate)에 위치한 그린마켓(Green Market)이라 불리는 현지 시장을 찾아 현지인들의 소박한 삶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유럽치고는 촌스러운 듯 한 색상과 디자인의 의류 및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필품, 신선한 계절 과일과 육류, 채소류 등 소소하고 평범한 시장 풍경이다. 얼핏 봐도 내게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옷가지들, 입맛에는 맞지 않을 것 같은 가공 육류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게 필요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뭐라도 사갈 요량에 신선해 보이는 과일 몇 가지와 스플릿을 기념할 수 있는 기념품을 구입했다. 기껏해야 10쿠나를 넘지 않는 기념품들이다. 바가지를 쓰지 않았음에 행복해했고 혹시라도 내가 산 가격보다 싸게 파는 가게를 발견하면 무척이나 화가 났다. 시장 구경을 포함한 위대한 세계문화유산 탐방은 시도 이틀 만에 종료됐다. 이후 대부분의 날은 한적한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사진을 찍고 근처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한량이 되어 보낸 시간뿐이다.

 

스플릿의 항구 주변은 흐바르 섬과 이탈리아로 오가는 페리터미널과 요트, 보트 정박지, 크로아티아 주변 도시를 오가는 기차역, 버스 정류장이 위치해 있어 스플릿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모든 교통이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여행자들은 어렵지 않게 주변 지역을 넘나든다. 자그레브에서 버스를 타고 스플릿에 들어오는 여행자라면, 오바라 크네자 도마고지아 2 로드Obala Kneza Domagoja II라 불리는 거리에서 내리게 되는데 어떤 수단을 이용하든지 간에 몇 분만에 구시가지로 도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리바 거리로 통하는 구시가지 중심으로 스플릿을 여행을 하게 된다.

 

 

‘프레포로다Preporoda’ 또는 ‘오바라 흐바스토그 나라드노그 프레포로다 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라 불리는 마을의 대표 해안 거리는 ‘리바’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데 흡사 카페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럽풍 노천카페들이 가득하다. 500m 남짓한 리바 거리에는 유럽풍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를 비롯해 여행자들을 위한 환전소, 여행사, 우체국, ATM 등의 편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거리를 화사하게 수놓고 있는 리바의 노천카페에는 커피향을 따라 나온 현지인들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경험하기 위한 여행자들로 즐비하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커피는 향이 일품이다. 철제 의자와 고급스러운 티크우드의 테이블, 높게 달린 파라솔 사이로 펼쳐진 아드리아 해의 모습은 이곳을 찾은 모든이 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한다. 물론 성수기였다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펼쳐야 하겠지만 다행히 12월이다. 백발의 노신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한산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행복하다. 커피 한 잔을 마신들, 책을 한 권 읽고 있든, 몇 시간을 앉아 있든 누구 하나 눈치를 주는 일이 없으니 말이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의 기억은 십중팔구 잊혀지겠지만 멈춰있는 여행의 기억은 절대로 잊혀지는 법이 없고 내 마음속 어딘가에 그대로 멈춰 있다.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지금 이순간 잠시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

 

비수기의 스플릿은 화려하지 않지만 운치 있다. 금요일 밤은 그나마 분주한 편인데 거리의 레스토랑과 술집은 꽤 늦은 시간까지 손님이 오가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을 보낸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어항 주변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는 풍경은 새로울 것이 없고 이른 아침, 커피를 마셔야 할 시간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스플릿의 하루만큼이나 리바 거리는 길다. 주말이 되면, 리바 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일을 보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노천카페에 앉아 모닝커피나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 항구 주변에 모여 낚시를 하는 사람, 보트를 정비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 주인과 산책을 나온 애완견들까지…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그들도 황제가 누렸던 행복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행여나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 하늘에 울려펴진다. 축구 경기를 함께 시청하며 잠시 그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보는 것도 나에겐 소중한 일상으로 다가왔다.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동에 대한 부분이다. 차량을 대여해 여행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혼자서 여행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결코 쉽지 않는 선택이다. 처음에는 비행기를 타고 지역을 옮겨 다닐 계획이었지만 무슨 연유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버스가 더 낭만적일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동하는 모든 시간대가 늦은 밤 또는 새벽 시간이었기에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아쉽게도, 단언컨대 없었다. 슬프지 아니한가!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면서 난 두 번의 장거리 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첫 번째는 도착 첫날, 자그레브에서 스플릿으로 이동하는 동안이었고 두 번째는 스플릿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떠나는 날이었다. 마지막 두브로브니크에서 자그레브로 이동하려는 계획은 비행기로 대체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자그레브는 둘러보지 못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결정한 버스의 선택은 여행 일정을 짜는데 있어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일정을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야 하고, 행여나 버스를 놓치기라도 하게 되면 일정 자체를 수정해야 하기에 버스를 타야 하는 날이 되면 그 어느 때 보다 예민해진다. 게다가 5~6시간은 기본, 때로는 10시간, 마지막 날의 경우 16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 그러나 막상 버스를 타면, 골아 떨어지기 십상이지만...

 

좋은 점도 있다. 비행기와는 달리 창문이 열린다는 것은 내가 버스를 좋은 가장 큰 이유다.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온도를 맞추기엔 버스만 한 것이 없다.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 피곤함도 길을 잃을까 노심초사하거나 두 갈래 길과 세 갈래 길 사이에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예찬은 바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동 중간중간 주섬주섬 노트나 수첩을 꺼내 잡다한 감정 표현들을 기록하거나 두서없이 끄적거리기도 한다. 여행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미리 그려보기도 하며 여행 속 또 다른 여행을 가능케 한다. 별 다른 생각 없이 기록한 끄적거림들이 이외의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그간 여행을 통해 확인하고 검증한 터라, 무의식적으로 버스를 선택해왔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여행자라면, 크로아티아의 버스 여행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과거 해양 관련 미디어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하게 되면 언제나 요트나 보트와 관련이 있는 마리나를 찾곤 한다. 해양 강국으로 알려진 크로아티아에서도 마리나 투어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일정 중에 하나다.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카메라와 우산을 챙겨 들고 스플릿 북쪽에 위치한 A.C.I 마리나로 향한다. 아득하게 보이는 마스트를 나침반 삼아 걸어본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바다 갈매기 떼의 수를 세 아리며 걷기를 30여 분. 그 사이 짧고 굵게 내린 소나기가 운동화 앞부분을 흠뻑 적셨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발에선 물줄기가 빠져나간다. 군대 제식 훈련을 하 듯 직각의 각도로 발을 차며 남은 물기를 뽑아냈다. 작은 언덕과 요새처럼 복잡한 입구를 통과하자 드디어 마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드리아틱 크로아티아 인터내셔널 ADRIATIC CROATIA INTERNATIONAL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마리나하면 떠오르는 풍경들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마스트는 하늘 높이 뻗어 있고 요트와 보트를 계류하기 위한 로프들과 앵커, 체인, 로프트 등이 갱어웨이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마리나 데스크와 클럽하우스에는 입항과 출항 준비를 하는 세일러들과 요트맨과 보터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멋진 마리나 레스토랑과 바를 찾은 일반인들의 모습도 쉽게 목격됐다.

 

"안녕!"
"일본사람? 중국사람?"
"여기는 멤버십 클럽이야, 레스토랑은 옆으로 가면 있어."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메탈 선글라스를 낀, 강한 영국식 액센트를 구사하는 세일러가 로프를 정리하며 말했다. 아마도 해산물 레스토랑을 찾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인이 이곳까지 마리나를 보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안녕!"
"크로아티아 사람? 영국사람?"
"여기가 마리나지. 클럽하우스가 어디지?"


성대모사를 하듯이 비슷한 액센트와 말투로 되물었다. 굽힌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두 손을 탈탈 털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오른손을 바지에 슥슥 닦고는 악수를 청한다. 입구에 설치된 장금 장치를 열어주고 나를 클럽하우스로 안내했다.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수놓은 셀 수 없이 많은 마리나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이 뚜렷하다. 스플릿 A.C.I 마리나는 100피트 이상의 메가 요트를 포함해 700여 척의 요트와 보트를 계류할 수 있는 계류장과 200피트 이상의 크루즈가 정박할 수 있는 대형 계류 시설도 보유하고 있어 유럽과 지중해의 크루즈 기항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인데 늘어나는 요트와 보트, 크루즈의 수요를 맞추기 위함이라고 그는 말한다. 도크는 물론 주유시설과 크루즈와 페리를 위한 계류장 공사가 끝나면, 마리나는 구시가지에서 가장 멋진 명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마스터 붐의 수를 세 아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요트들이 항구 도시 스플릿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줄 것이고 더욱 많은 워터프런트 레스토랑과 카페테리아들이 들어서 제2의 리바 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마리나 관리자인 그를 통해 크로아티아와 스플릿 마리나에 대한 궁금점들을 해결했다. 마리나를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남겨두기로 했다.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들르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스플릿에 떠 있는 페리와 요트, 보트만큼이나 다양한 섬들을 보유한 크로아티아. 아시아 여행자가 아닌 유럽인에게 크로아티아를 찾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Island Hopping’이라고 한다. 다수의 섬과 긴 해안선을 가진 나라에서만 가능한 선택이다.

 

“그런데 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한다. 리바 거리의 커피 향과 스플릿 항의 풍경에 취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며칠 전, 다녀온 마리나를 다시 찾았다. 당장에라도 떠날 수 있는 섬을 찾기 위함인데 한적한 갱어웨이에는 세일러들과 요트맨들이 분주하게 항해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어디로 들 가는 것인가. 클럽 하우스에 들러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에서부터, 알려지지 않은 비밀 섬, 평상시의 10배가 넘는 비싼 물가를 치러야 하는 인기 휴양섬까지. 누가 뱃 사람 아니랄까. 경쟁하듯 심해지는 섬 사랑에 백기 투항. 결국 나의 발길은 스플릿에서 43Km 떨어진 흐바르 섬(Hvar Island)으로 연결됐다.

 

주저할 것도 없이 인근 페리 터미널에서 다음날 출발할 클리오 제트(Krilo Jet) 흐바르 행 카타마란 여객선표를 구입했다. 편도 35쿠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어귀의 작은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본다. 얇은 스파게티 면, 토마토소스, 햇반(봉지채 넣어 끓이면 밥이 되는 크로아티아 표 햇반), 음료, 맥주, 아이스크림, 우유, 계란 등을 골라 계산한다. 200쿠나 가량. 내가 지내고 있는 집은 전통 방식으로 건조된 석조 골조 주택이지만 꼭대기 층을 나무를 이용해 개조한 형태다.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옥탑의 장점은 추울 때 춥고 뜨거울 때 뜨겁다는 것.


가끔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에는 그나마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온풍기를 틀어놓은 채 밤을 보내야 할 만큼 추웠다. 끓는 물에 면을 삼고 토마토 스파게티와 치즈를 올려 저녁을 준비했다. 보통은 인근 레스토랑에서 먹는 편인데, 비가 오는 바람에 집에서 먹기로 했다. 느긋하게 디저트까지 즐긴 뒤,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 늦은 밤, 고양이 울음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펴졌다. 고양이는 성대가 끊어질 만큼 울고 또 울었다. 그 날밤, 고양이가 잠들 때까지 괴로움에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흐바르 타운행 페리는 스타리 그리드 행보다 저렴하고 빨라 좋지만, 체크 아웃 시간이 지나는 관계로 두어 시간을 리바 거리에서 보내야만 한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스플릿의 풍경을 두 눈과 마음에 담는다. 오후 4시, 스플릿 항을 출발한 390톤급 크리오 제트 여객선은 시속 30노트를 넘나들며 아드리아 해를 내 달린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뱃 머리도 따라 심하게 올라간다. 흐바르 섬은 수십억을 호가하는 고급 요트와 보트, 이국적인 별장에 일조량(연간 2774시간)까지 높아 주말과 휴일에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현지인들과 노후를 만끽하는 유럽인들이 많은 전형적인 휴양 섬이다.

 

흐바르 섬까지 이동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페리다. 페리라 함은 차량까지 실을 수 있는 카 페리(Car Ferry)와 사람들만을 싣고 떠나는 카타마란 페리(Catamaran Ferry)를 의미한다. 흐바르 타운(Hvar Town) 행 카타마란 페리를 탈 수 있다면, 조금 저렴한 가격(35kn)에 섬까지 멋진 항해를 즐기며 여행을 이어갈 수 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기상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목적지가 흐바르 타운이 아닌 스타리 그리드(Stari Grad) 행 페리를 이용해야 하는데 오전에 자드로리니자 페리(Jadrolinija Ferry)를 타고 스타리 그리드로 입항, 현지 버스로 갈아타고 흐바르 도심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내가 이용한 카타마란 페리는 현지인들이 주로 애용하는 것으로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기존의 유람선이나 여객선과 비교하면 좌석 배치가 훌륭한데, 마주 보는 좌석 사이 테이블을 두어 한 시간 가량의 항해 시간을 편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운항 중간중간, 위협적이고 예상치 못한 배의 흔들림과 쏠림 현상(Rolling)을 경험할 수 있지만 멀미약을 준비한다면 큰 걱정은 없다. 스플릿-흐바르 행은 해협을 넘나드는 바다 항해라 특히나 기상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바다가 익숙한 백발의 노부부와 혈기 왕성한 젊은 크로아티아 청년들은 평온하게 트럼프 카드를 치거나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멀어져 가는 스플릿의 풍경을 감상하는 정도. 페리가 속도를 더할수록 디오크레티아누스 궁전도, 리바 거리도, 바다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던 여행자의 모습도 서서히 멀어져만 간다. 스플릿 시가지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유난히도 낮게 깔린 구름만이 하늘과 바다를 구분해준다. 마주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현지인이 말동무가 필요했는지 무미건조한 질문들을 던진다.

 

"미안, 나는 영어를 잘 못해!"

 

약간의 보디랭기쥐를 함께 사용하면, 대게 97%, 대화가 종료된다. 오지랖이 넓은 3%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흐바르 섬은 성수기에 특수를 맞는 휴양지로 유명한 해변과 질 좋은 와인들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전역에 포진되어 있으며 이들의 와인은 2,500년 전 이주한 그리스인들로부터 처음 전파된 것으로 흐바르 섬의 스타리 그리드 지역은 과거 명맥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포도밭이 지금도 운영되고 있어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한다고 한다. 때문에 성수기인 6월~9월에는 스플릿에서 술을 마시다, 배를 타고 흐바르 섬으로 넘어와 아침까지 와인을 마시고, 이른 새벽 첫 배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다반사. 그러나 비수기 시즌에는 유명한 레스토랑이나 관광지조차 문을 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방문 시 확인은 필수라고 한다. 이러 쿵 저러 쿵 일방적인 태도로 흐바르의 모든 것을 소개한 현지인의 결론은 결국, 자신이 숙소를 운영하고 있으니 싸게 주겠다는 것.

 

한 시간 가량의 항해가 끝나갈 무렵, 흐바르 섬에 당도했다. 성수기 시즌이라면,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겠지만 한적한 겨울에는 텅 빈 거리와 유난히도 빨리 찾아오는 어둠만이 이방인을 반겨준다. 물론 저렴한 숙박비와 한산한 거리는 머무는 시간을 늘릴 좋은 기회가 되어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최고의 시기가 되어 준다. 서둘러 짧은 인사를 하고 미리 예약한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이른 아침, 해가 뜸과 동시에 흐바르 마을의 골목 탐방에 나선다.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섬이지만 하려고 마음먹으면 끝이 없다. 베네치아 요새에 올라 흐바르 도심의 그림 같은 풍경도 담아야 하고 항구 앞 레스토랑에 앉아 해산물 요리도 맛보아야 한다. 골목골목 자리한 관광 명소도 찾아가야 하고, 라벤더 향도...

 

스테판 광장 근처의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16세기 지어진 베네치아 요새(Tvrdava Spanjola)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 30분 남짓 언덕길을 따라 올랐다. 이윽고 도착한 요새 앞, 파리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다. 불길한 예감으로 수차례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필요한 물품을 싣고 올라온 요새 관리인을 만났다. 굳게 닫혔던 문은 열렸으나 입장은 허락되지 않았다.

 

“비수기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짧고 굵은 관리인의 한 마디.
"여기까지 오기 위해 비행기와 버스, 배까지 타고 왔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궁색한 이유를 늘어놓는다.
"좋습니다. 하지만 단 한 시간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의 입장이 허락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마냥, 요새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대포를 쓰다듬는가 싶다가, 요새에 탑에 오르기도 하고 짧은 시간 모든 풍경을 담기 위한 카메라는 멈출 줄 몰랐다.

 

 

요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란 스테판 대성당과 광장, 아드리아 해에 둥실둥실 떠 있는 보트와 요트들, 드넓은 지중해의 풍광, 붉은 석조 주택들의 지붕, 아기자기한 골목과 전통 주택들의 모습들 정도지만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을 느낄 수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 살아있는 듯한 이 기분. 흐바르 섬에서 시간을 만끽한다.

 

또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에 나가 내일 떠날 배편을 알아보니, 짓궂은 날씨 때문에 배가 뜨질 않는다고 한다. 서둘러 하루 더 묶을 숙소를 잡고 차가워진 몸을 녹이러 스테판 광장 근처 카페를 찾는다. 운치 있는 분위기와 따뜻한 벽난로에서 나오는 장작의 힘이 온몸을 노곤하게, 기분 좋게 만든다. 옆 테이블에 자리한 노신사는 중절모에 낡은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카푸치노와 장작불, 조금은 이른듯한 크리스마스 캐럴. 비수기, 겨울, 사람은 없지만, 따뜻함이 있다. 흐바르 지역은 섬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카페와 호텔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여름에는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크루즈를 즐기는 것이 다반사지만 겨울은 생각보다 을씨년스럽다. 비수기 여행자들은 베네치아 요새, 교회, 박물관 등이 역사적 명소들을, 아니 문 연 곳을 찾아 둘러보는 정도다.

 

흐바르 타운은 인기 휴양지답게 장기간 체류를 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스튜디오타입의 숙소가 많고 가격도 다른 유럽에 비해 상당히 저렴해 보통은 몇 주씩 머물다 간다. 나 역시 비교적 싼 가격에 숙소를 구했다. 1박에 약 100쿠나 정도. 스테판 광장 중턱에 있던 아파트를 떠나 광장 중심의 숙소로 이동했다. 트렁크를 끌고 올라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려오는 일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덜커덩 거리는 트렁크 바퀴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려 펴지는 무례함을 이겨내며 숙소 앞에 도착했다.

 

인터넷을 이용해 예약을 한지라 숙소는 언제나 반신반의. 비수기라 그런지 숙소의 문은 언제나 굳게 잠겨있다. 문 앞에 붙여진 미션 메시지를 하나씩 해결하자, 멀지 않는 집에서 집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누군가와 심각한 통화를 하기 시작. 크로아티아어라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뭔가 일이 났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
잠시 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미안합니다. 계획대로라면 공사가 마무리되었어야 하는데 요 며칠 비가 많이 내린 관계로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어요.
저는 집수리를 하는 사람이고 이곳 주인은 현재 유럽에 있어요. 성수기를 대비해 아파트를 수리하려고 한 건데...
일단 올라오시지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자르다 만 나무토막과 정리되지 않는 전기배선들이 널 부러져 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 이런 곳에서는 단 한 시간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서로가 인지했다. 몇 차례 전화를 통해 해결책을 제시했다.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숙소를 소개해줄 테니, 그곳에서 지내라는 것. 흔쾌히 그러기로 하고 친구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나타난 친구는 바로 내가 흐바르 섬으로 들어올 때 페리에서 만났던 그 현지인이다.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흐바르 섬의 여행은 계속됐다.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오전에는 비가 잦아들기 기다리며 숙소에서 지내고 오후 무렵 시내로 나와 거리를 둘러보는 것이 보통이다. 오후 4시면 마을은 빠르게 어두워진다. 저녁은 인근 레스토랑에서 먹거나 숙소에서 직접 해 먹는다. 기상 악화로 예정보다 이틀간의 일정이 늘어났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라도 흐바르 섬을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또다시 시작된 하루, 오전에 출항 예정이던 카타마란 페리가 다시 취소. 날씨가 좋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항구의 구조 때문이란다. 카타마란이 계류하기에는 어항 시설이 너무 작아서 자칫 계류를 시도하다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오후에 스타리 그리드로 이동, 카 페리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 스타리 그리드에서 스플릿까지 운행하는 카 페리의 경우, 요금은 39쿠나(kn)로 카타마란보다는 약간 비싼 편이지만 배가 훨씬 크고 취소가 거의 없다. 단, 스플릿까지 소요시간이 2시간으로 오래 걸린다는 점과 흐바르 마을에서 스타리 그리드까지 이동하는 버스의 스케줄이 매주 바뀌기 때문에 미리미리 확인을 해두어야 한다는 정도. 택시나 미니밴을 이용해 갈 수도 있지만 비싼 요금을 감수해야 한다.

 

버스 정류소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버스를 기다린다. 카 페리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풍경 역시 카타마란 페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운항 시간이 길어 잠을 청하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후 5:30분에 출항한 카 페리가 스플릿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30분이 조금 넘어서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스플릿 리바 거리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러 신선한 해산물이 가득 들어간 스파게티와 맥주를 시키고 다음 목적지인 두브로브니크행 버스의 첫 번째 차 시간을 확인한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며 섬을 오르락 거린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흐바르. 비수기라 볼 것이 없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흐바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본 흐바르의 사진은 그때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꾸만 떠오르는 따뜻한 장작불의 노곤함... 지금 이 순간에도 스플릿 항구 주변에는 흐바르 섬으로 향하는 페리와 요트, 택시 보트가 쉴 새 없이 항을 오가겠지!

 

행여 눈치채지 못했다면, 둘러보시라.
오랫동안 후회하는 마음으로 스플릿을 기억하기 싫다면, 지금 당장 흐바르 행 페리에 몸을 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장소는 스플릿 버스 터미널. 때는 흐바르 섬 여행을 마치고 스플릿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이동하려고 했던 그날밤 늦은 새벽. 흐바르 섬에서 계획된 날에 나올 수 있었다면, 아니 아침에 출항하는 첫 배만 타고 나올 수만 있었다면, 아름다운 윤슬을 감상하며 아드리아 해가 펼쳐진 서남부 해안도로를 달릴 수 있었겠으나, 기상 악화로 인해 마지막 배를 타고 나오는 바람에 새벽 2:30분 발 장거리 야간 버스에 올라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스플릿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야간에 출발하는 버스 표를 샀다.

 

“목적지인 두브로브니크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4시간이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밤에는 대략 5시간은 족히 걸릴 거야”

 

버스 터미널 안 매표소 직원의 투박하고 무덤덤한 한 마디였다.

 

허기진 배도 채울 겸 톤시세바Tonciceva 골목 내 위치한 피자리아 갈리자 레스토랑에서 두툼한 도우의 피자와 스파게티, 생맥주를 마시며 스플릿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즐긴다. 다 비운 맥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으로 스플릿, 흐바르 섬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새벽 버스를 타기 전까지의 시간은 크로아티아 여행 중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순간들의 연속으로 흔한 사진 한 장도 찍을 수 없을 만큼 불안했다. 수첩 속에 마구 갈겨 적어 놓은 메모를 보면 당시 상황은 대충 이랬다.

 

시계 배터리가 다 달았는지 수차례 조명 버튼을 눌러도 도통 말을 듣지 않음. 시계바늘이 11시를 가리키자, 마지막까지 불을 밝히던 카페와 바도 문을 닫기 시작함. 거리에 남은 불빛은 버스 터미널과 24시간 편의점, 공중전화 부스 정도가 전부. 엄습해 오는 오싹한 기분. 정류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한둘 모여듦. 학창 시절, 동네 노는 형들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과 정말 똑같음. 늦은 밤, 거리는 비나 추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건장한 청년들이 점령했음. 버스 정류장의 작은 대합실은 버스를 기다리며 짐 가방을 품 안에 감싸고 있는 여행자,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는 취객, 갈 곳을 잃은 노숙자들이 점거했다. 인적이 드문 새벽이 되니, 버스 터미널은 스플릿의 어둠과 추위,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소외 당한 사람들의 안식처로 변해가고 있음. 웬만해선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 무섭다. 행여나 버스를 놓치지는 않을까,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순간순간 변하는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졸린 눈을 참으며 버스를 기다린다. 젠장, 예정보다 조금 늦은 새벽 2:45분에 기다리던 두브로브니크 행 버스가 도착했다. – 12월 15일, 스플릿 버스 대합실에서

 

버스 안은 빈 좌석이 보이지 않았다. 정류소에 들를 때마다 잠이 깨고 들고를 반복한 모양이다. 혹여 소리라도 날까, 조용조용 자리를 찾아가 잠을 청해본다. 보스니아 국경을 넘나들며 여권 검사를 위해 잠시 깬 몇 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안락하다. 어두웠던 차창 밖이 서서히 밝아진다. 아드리아 해의 동이 터 오르는 것이다. 버스가 도착한 두브로브니크의 버스터미널은 스플릿과 마찬가지로 보슬비가 내린다. 터미널 휴게소에서 따뜻한 음료 자판기를 발견하고 핫 초콜릿 한 잔을 뽑아 마시며 이리저리 뒤척이며 움츠렸던 몸을 푼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두브로브니크의 풍경은 어딜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지도는 압축된 것이 분명했고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지도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신시가지 외곽이다. 터미널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현지 버스로 다시 갈아탔다. 출근을 재촉하는 현지인들 사이로 트렁크와 배낭을 내려놓자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로 달려가는 사이 다행히 비는 잦아들고 있다. 새벽부터 시작된 고단하고 두려웠던 하루가 비로소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12월 두브로브니크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다. 해가 짧아져 밤이 일찍 찾아오다 보니 제아무리 노력해도 자정을 넘기기 힘들다. 스플릿과 흐바르 섬을 거쳐 두브로브니크까지 내려오는 동안 크로아티아의 날씨는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해가 뜨고 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겨울에 접어든 요 며칠은 새벽 내내 비가 내리고 체감 온도까지 떨어져 여간 고생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이른 아침 마시는 뜨거운 커피나 차 한 잔은 여행 중 생긴 새로운 습관이 되었고, 혹시 몰라 준비한 수면 양말을 신고 자야 하는 날도 역시나 늘어만 가고 있었다. 손에 쥔 커피를 들고 방안과 거실을 오가며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면 그나마 체온이 조금 올라가곤 했다.

 

해가 떠오르는 시각은 조금씩 늦어지고 있는 겨울, 해가 뜨기 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낡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거나 침대 위에 시내 지도를 펼쳐 놓고 하루 일정을 고민하는 정도. 내가 묶고 있는 이곳은 구시가지 성곽 안, 두라 발레비 골목 중턱 즈음에 위치한 여행자 숙소로 300년의 세월을 버텨 낸 오래된 석조 주택이다. 다시 말해 운치는 있으나 무척 춥다는 뜻이며 지난번 묶었던 스플릿의 숙소보다 햇볕도 덜 들어 훨씬 더 추운 느낌이다.

 

낡은 청동 열쇠로 아파트 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와 크로아티아 최남단에 위치한 두브로브니크를 마주한다. 마치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 듯 좁고 가파른 계단과 골목길을 이리저리 휘집고 다닌다. 비슷비슷 보이던 골목길이 차즘 익숙해진다면, 그것은 꽤나 오래 머물렀단 뜻일 테고, 다른 말로는 아쉽게도 떠날 날이 다가왔다는 증거다. 언제나처럼 귀에 꽂은 이어폰을 따라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발걸음을 맞춰 구시가지의 작은 골목길로 외유를 나선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과 따뜻한 햇볕은 오후 무렵에나 성안을 비추는데, 이때가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순간이다. 낯설고 차갑게만 느껴졌던 구시가지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성곽 안에 보일 듯 말 듯, 자리한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함을 마셔본다. 카페는 흔한 가정집을 개조한 것으로 화사한 실내 장식과 밝은 조명, 지나간 잡지들이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다. 여름이었으면 길게 늘어선 줄을 서다 하루가 갔을지 모르겠지만 한적한 초겨울에는 어디를 가든 기다림 없이 편하게 둘러보고 즐길 수 있다.

 

여행자 정보 센터를 찾아 두브로브니크 카드를 구입한다. 카드 하나면 지역을 오가는 시내버스는 물론 지역 내 대표 관광지를 무료로 둘러볼 수 있어 여행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하고 유용하다. 가장 먼저 성벽을 올라가 보기도 했다. 구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길이 1940m, 높이 25m의 성벽은 유럽에서 가장 견고한 건축물로 손꼽힌다. 성벽은 3개의 중요 요새와 16개의 성탑, 2의 피신용 성채, 모퉁이 방어 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이중 민세타(Mincenta)는 전략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가장 높고 단단한 요새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성벽 입구 가파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시작은 아드리아 해를 마주하고 있는 성곽 보이는 로브리예나츠 요새에서부터. 좁다란 성벽 길은 아찔함이 느껴질 정도로 높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평지에서 본 것과는 달리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걸었을지 모를 세탁물과 아슬아슬한 담벼락을 의자 삼아 앉아 있는 이름 모를 고양이, 주황색 지붕과 파스텔 색조의 창틀은 중세 시대, 아니 요즘 시대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매칭이다.

 

성벽을 따라 구시가지를 둘러보다, 윤슬의 아드리아 해를 마주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카페테리아를 발견했다. 부자 카페(Buza Bar & Café)라 불리는 곳인데 성벽의 북쪽 자연 절벽 위에 있는 카페 겸 바로 석회색 자연암과 하얀 파라솔이 달린 야외 테이블이 푸르고 짙은 바다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여름에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일광욕을 즐기고, 겨울에는 일몰을 감상하며 느긋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두브로브니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카페다.

 

카페를 뒤로하고 해양 박물관 도착했다. 이제야 딱 절반을 돌아온 셈이다. 박물관에는 이탈이라의 무역 항으로, 베네치아 군주(1205~1358)의 땅으로, 라구사(Ragusa) 공화국의 도시국가로, 지중해 최고의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던 당시의 생생했던 기록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찬란했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큰 지폐를 바꾸기 위해 산 바게트 빵을 꺼내 허기를 달랜다.


요새 내 탑에서 내려다보는 구시가지의 모습은 아드리아 해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주황색 지붕과 드높은 하늘, 좁은 골목들과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애니메이션 ‘마녀의 우편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 )’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만화 영화의 실제 모티브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두브로브니크다. 빗자루를 타고 집을 떠난 주인공 키키와 검은 고양이 지지, 우연히 도착한 마을에서 지내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만화 영화 속 시계탑과 빵집, 바닷가, 이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사진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좋은 풍경을 담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불가능하다.

 

미네타 요새에서 바라본 구시가지는 중세 시대의 정취가 흐른다. 구 항구와 연결되는 루자 광장(Luza Square)에는 스폰자 궁전(1667 대지진에도 파괴되지 않음)과 자유도시의 상징인 롤랑의 기둥(Orlando Column),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 성당(Church of St. Blaise), 민족운동가이자 시인으로 활약했던 군들리치를 기리는 (Gunduliceva Poljan) 광장, 귀족들의 행사에만 사용되던 렉터스 궁전(1453년 건축)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군들리치 광장은 이른 아침과 일요일에는 현지인들을 위한 소소한 시장이 열리기도 하는데 아파트와 멀지 않아 한 두 번 가량 신선한 과일이나 갓 잡아 올린 해산물을 사와 요리해 먹기도 했다.

 

 

 

로브리예나츠 요새가 보이는 성벽의 입구인 필레 게이트(Pile Gate)에서 성벽 관람을 끝이 난다. 성벽을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어느덧 4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필레 게이트 주변은 신시가지를 비롯해 인근 타운으로 이동하는 버스들이 오가며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두브로브니크 여행을 시작하는 곳이다.

 

인접한 여행자 정보 센터에서는 두브로브니크 카드를 비롯해 다양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베이커리, 잡화점, 액세서리 가게 등도 자리하고 있어 언제나 분주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볼만한 풍경은 따로 있다.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두 영혼은 다름 아닌 게이트 입구에서 낭만적인 바이올린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와 눈부신 햇살을 덮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길 고양이들이다.

 

 

 

 

 

구시가지의 성벽 안에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모코시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내가 탄 1A MOKOSICA 행 버스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 버스는 한적한 현지인들의 마을을 지나 낯선 풍경 속으로 진입한다. 다행히 마지막 정거장이 마리나이기에 버스가 멈추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멈출 듯 멈추지 않는 버스.

 

아침부터 들떴다. 평상시라면 커피 한 잔을 마셨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상큼한 오렌지 향이 가득한 프랑크(franck)차 한 잔을 끓인다. 보통은 구시가지 인근이나 주변 관광지를 보는 것이 주된 코스지만 뭔가 특별한 두브로브니크의 풍경을 보고 싶어졌다. 크로아티아 여행을 준비 전, 크로아티아 친구에게 지나가는 말로 만약 크로아티아에 간다면, 어디를 추천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모코시카 이야기를 꺼냈다.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하고 계속된 일정에 지칠 무렵,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두브로브니크 서북부에 위치한 이 마리나는 요트와 보트의 정박지로도 유명하지만 마리나까지의 가는 길이 더욱 아름다운 현지인들의 마을이다. 아드라아틱 해협과 작은 수로를 따라 보이는 풍경은 경험해보지 않고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현대식 마리나와 험난한 산세, 굽이굽이 떠 있는 요트들과 보트들의 향연, 수로가 끝나는 그곳에 친구의 고향이자, 내가 찾는 풍경이 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떠난 지 약 40분, 저 멀리, 요트의 마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주황색 지붕 위로 쭉쭉 뻗은 마스트는 정말 한 폭의 그림 같다.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색들이 조화를 이룬 까닭에 인공적인 마리나가 주는 삭막함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고 만들어 낸 이 작품은 제아무리 비싼 고급 사진기라고 해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내 두 눈에 담고 오래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할 수밖에...

 

 

 

 

불과 하루전만해도 시내 곳곳을 정신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덧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 언제부턴가 여행의 목적이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변해 버렸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런 의무를 준 것이 아니지만, 여행 작가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니 생긴 이상한 병이다. 그래서 가끔은 머릿속을 깔끔히 비워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쓰는 나만의 즐거운 놀이가 있는데, 두브로브니크의 마지막 하루는 그것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필레 게이트(Pile Gate)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는 버스에 무작정 올랐다. 필레 지역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오가는 버스들의 마지막 종점이기도 하다. 대 여섯 개의 버스 노선이 필레를 출발해 인근 지역으로 오간다. 가장 먼저 올라탄 4번 버스는 고리카(Gorica), 라파드(Lapad) 지역을 지나 두브로브니크 최남단의 위치한 팰리스 호텔까지 운행하는 버스로 라파드 해변을 둘러보고 싶다면, 이 버스를 타야 한다.

 

아무 버스나 타는 이 놀이가 재미있는 이유는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기에 잘못 도착할 위험도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출발지와 도착지의 압박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마음 내키는 곳에서 내리면 그만일 뿐이다. 그런데 이 버스는 이상하리만치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적다. 잠을 부르는 버스 안 온도와 약간의 진동은 내리고 싶은 마음을 붙잡았고 결국 마지막 정류장인 팰리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까지 잘 조성된 거리를 다시 걸어 내려오다 운 좋게 해변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갔다.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고급 빌라들과 호텔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자갈과 모래가 뒤섞인 해안을 따라 걸어본다. 기대했던 특별함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6번 버스를 탄다. 니콜레 테스레 지역에서 5명이 승차하고 20여 명의 승객이 하차했다. 의미 없는 덧셈과 뺄셈 끝에, 21번째 승객으로 생각 없이 따라 내렸다. 발걸음이 닿는 데로 무작정 걷다 보니, 두브로브니크 항구를 따라 형성된 작은 해협이 나타났다. 신시가지의 오발라 스테파나 라디차 중심 도로를 따라 도심까지 인접해 형성된 해안 풍경이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스플릿의 리바 거리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두브로브니크 항은 크로아티아의 대표 도시들을 오가는 국내선 페리와 이탈리아 바리(Bari)를 연결하는 국제선 페리가 운영 중이다. 페리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마주하고 있는 이탈리아까지 이동할 수 있는 탓에, 유럽 여행을 준비하는 여행자에게는 훌륭한 루트가 되어준다.

 

항구와 마주한 쇼핑몰에 들러 구경을 하고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신 뒤, 또 다른 8번 버스를 타고 동쪽에 위치한 우체국 앞에서 하차. 두브로브니크 최고의 비치 클럽으로 손꼽히는 이스트웨스트로 내려가 보았지만 비수기의 클럽은 보란 듯 썰렁하다. 애써 아쉬움을 삼켰지만 그럼에도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성벽 내 위치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돌아와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 두브로브니크의 마지막 밤을 준비했다.

 

 

 

다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긴다. 아침 일찍 아파트 주인을 깨우기가 미안해 감사의 메시지를 적은 쪽지와 열쇠를 아파트 우편함에 두고 집을 나선다.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구시가지 북쪽의 성 마르코 대성당 부근 정류장(케이블카 사무소 앞)으로 이동했다. 버스 출발 시각이 다가오면서 몇몇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어둠이 거칠 무렵, 미니밴 한 대가 정류소 앞에 멈춰 서더니, 공항까지 저렴한 가격에 태워다 준다는 제의를 한다. 흔쾌히 받아 드린다. 사실, 여행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항 드롭 서비스인데, 공항버스가 도착하기 10분 전 여행자들을 먼저 싣고 가는 것이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지만, 흥정해야 하는 귀찮음이 생기곤 한다. 난생처음 만난 여행자들과 함께 두브로브니크 공항으로 출발.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공항에 도착했다.

 

일정은 두브로브니크에서 국내선을 타고 자그레브로 이동 도시 구경을 마친 뒤, 다시 이스탄불로 국제선을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연착과 잦은 취소로 명성이 높은 크로아티아 국내선이라, 하루 정도 여유를 두고 일정을 조율했다. 국내선이라 별다른 절차 없이 빠르게 입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렸다. 말로만 듣던 불행은 나를 피해 가는 듯했지만, 탑승이 시작될 무렵 짤막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자그레브에 내리는 폭설로 인해 항공이 연기된다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6:30분 자그레브행 비행기는 취소됐다. 다음 비행기까지 다소 여유 시간이 있긴 했지만 오늘 안에 비행기가 다시 뜰지는 의문이다. 두 시간 가량의 대기 끝에 8:30분 발 자그레브행 비행기가 또다시 취소. 오전 비행기가 취소되면서 일정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텅 빈 공항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미 부쳐버린 짐들을 되찾아 다시 붙여야 한다는 것. 크로아티아 항공사는 대체 항공편이 마련되지 전까지 샌드위치와 음료 하나씩을 승객에게 제공했다. 자그레브를 거쳐 이스탄불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독일 뮌헨을 거쳐 들어가는 경로로 변경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 이틀 여유 있게 일정을 짠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경유 노선을 이용하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한국 여행자들의 완전히 일정이 꼬여버렸다. 공항 직원의 도움으로 짐을 다시 뮌헨행으로 붙인 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공항 직원은 두브로브니크 출국 도장 쾅쾅 찍었고 나는 자그레브가 아닌 뮌헨을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예상치 못한 일련의 사태로 인해 크로아티아 여행은 반쪽뿐인 퍼즐이 되고 말았다.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아드리아 해를 배경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 일광욕을 즐기며 분위기 있게 와인 한 잔을 들이켜고 싶었지만, 하루가 멀다고 내리는 비와 추워진 날씨에 때문에 감기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도시 전체를 두른 크라밧(Cravat)도, 하트 모양의 갈레슨챠크(Galesnjak)섬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파가 몰리지 않는 비수기에 찾은 탓에 모든 관광지를 독점할 수 있었고 한가하고 여유롭게 크로아티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 모르겠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아드리아 해를 둘러싼 아름다운 도시와 자연경관, 문화유산을 둘러보겠다는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비록 반밖에 볼 수 없어 아쉬운 여행이었지만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두 번째 크로아티아 여행을 떠나야 할 완벽한 명제가 생긴 셈이다. 나머지 반쪽짜리 퍼즐 맞추고 싶어진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듯, 크로아티아에 취해 보냈던 일련의 시간이 요즘 들어 자꾸만 떠오른다. 유난히도 추웠던 크로아티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EU)의 28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이제는 쿠나가 아닌 유로를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크로아티아는 내게 낯선 곳이 아닌 너무나 익숙한 곳이다. 골목골목의 풍경과 진한 커피 향기, 매일 밤 울어대던 고양이의 모습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크로아티아에 몇 개의 점을 찍었다.

 

 

작성일 2016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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