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GINS

2020. 12. 31. 12:21BUCKET

Bucket List

꿈과 목표가 늘어만 가던 다이어리 첫 장, 가장 윗줄엔 굵은 펜으로 선명하게 ‘surfing’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버킷 리스트가 하나씩 지워져 가는 순간에도 언제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역시 ‘surfing’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어려운 버킷 리스트 중 가장 하나가 바로 ‘surfing’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나만의 버킷 리스트에 머물고 있었던 서핑, 결국 지워버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난 그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공항 대합실, 삼삼오오 모여 담배 한 모금에 여행의 피로를 잠시 풀고 있었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꺼낸 빛바랜 잡지 한 권, 뜨거운 태양, 부서지는 파도를 타는 서퍼들의 모습에 꿈틀거리던 본능이 되살아나버린 것이다. 평상 시라면 기분 좋은 상상만으로 잠이 들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치솟아 오르는 감정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동이 터올 때까지 머릿속으로 최상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퀸 스트리트 인근에 위치한 여행사 사무실이 문을 연 시간에 맞춰 시내로 나섰다. 사진 속 목적지를 설명하고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걱정과 설렘이 반복됐다. 이른 아침부터 잡지 속 사진을 찢어 사무실을 찾은 소년의 방문에 현지 키위 직원들도 꽤나 놀란 모양이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 따끈따끈한 항공권을 한 장 손에 들고 거리로 나섰다. 햇살이 따뜻한 5월의 오클랜드는 아름다웠다. 멀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 직원이 재빨리 나와 신호등을 건너려는 나를 붙잡았다.

 

“뽀삐스로 가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아유비치인의 마데를 찾고. 그럼, 행운을 빌어, 내 이름은 조쉬아야!”


알쏭달쏭 암호 같은 이야기들. 뽀삐스, 아유비치인, 마데 그리고 내가 가야 하는 곳 발리.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서 출발해 멜버른을 거쳐, 인도네시아 발리로 떠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호주 멜버른이었다. 발리로 향하는 가루다인도네시아 항공편을 타기 위해 지루한 8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키위 녀석이 옆자리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뉴질랜드 북섬, 왕가레이에서 살고 있는 이 녀석도 발리가 최종 목적지란다. 가방 하나가 전부인 나와는 달리, 녀석(잭)의 가방은 들기도 어려울 만큼 높고 거대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점점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직 잘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길도 모르고, 환전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 잭은 어이없는 웃음과 어디 한번 당해봐라는 말투로 나의 무지함을 꼬집었다. 그것도 잠시, 비행시간이 다가오면서 게이트 주변으로 누가 봐도 불량한 호주 녀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나는 오지다’라고 말하듯, 강한 호주식 엑센트를 구사하며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점점 강해져 가는 오지들의 텃세에 잭과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벤치 끝에는 일본 친구들의 모습도 몇몇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 발가락이 훤히 보이는 비치 샌들, 엉덩이까지 내려온 보드 숏을 걸친 젊은 청춘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여행, 우연한 잭과의 만남, 그렇게 시작된 서핑 트립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Surfer’s Paradise Bali

난생처음 들어보는 언어다. 기장은 다소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덴파사르 국제공항 도착을 알렸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드디어 도착이다. 인도네시아, 세계사 시간에 스쳐 지나가듯이 배운 몇 줄이 내가 아는 전부다. 낯선 향기,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그래도 다행인 건 12시간 전에 만난 잭이 옆에 있다는 사실. 발리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 그에겐 모든 것이 익숙해 보인다. 능숙한 기술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낯선 발리의 풍경이 찻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고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택시는 생각보다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오토바이와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벽으로 피해 길을 내주었다. 마치 샌드위치 속 햄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을 정도다. 골목 곳곳에 세워져 있는 서핑 보드들을 보고 있자니, 잘 찾아온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어느 숙소 앞 주자창에 도착했다. 무거운 보드와 집채만 한 가방들을 내린 뒤 믿었던 잭은 아무렇지 않게 악수를 청하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친구라고 생각했고 믿었다. 녀석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마지막 인사였다.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결국 혼자가 되었다. 잘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녀석만 믿고 따라온 결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멍 해졌다. 게다가 배까지 고파왔다. 기내에서 먹은 샌드위치가 전부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행히 비집고 들어온 골목에는 허름하지만 손님이 꽤 있는 식당들이 보인다. 일단 목이라도 축일 겸 식당으로 들어가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주문하고 사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식당 메뉴도 낯설어 우선은 익숙한 스파게티를 시켰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뒤 주문한 스파게티가 나왔다. 마음 같아선 몇 번이고 취소를 하고 나가고 싶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지라 그냥 기다렸다. 내가 꿈꾸던 발리, 내가 그리던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잠시 후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식당 앞에서 멈췄다. 2~3명의 서양인들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잭이었다. 무심하게 떠나버린 줄 알았던 잭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짐을 풀고 오토바이까지 빌려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온 것이다. 반가움의 표시로 별이 그려진 현지 맥주를 사람 수대로 시켰다.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들이 겼다.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잭이 시설은 그리 좋지 않지만 위치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며 자기가 묶고 있는 숙소를 추천했다. 안 그래도 막막하던 참에 나타난 잭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숙소가 해결되고 나니 맥주 맛은 꿀맛으로 변해 있었다.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지만 좌절했고 나약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되찾았다.

 

평범해 보이는 숙소다. 인(Inn)이라 불리는 숙소인데 가격이 무척 저렴했다. 주로 서퍼들과 장기 여행자가 주로 머문다고 한다. 가장 먼저 숙소 앞에 작은 사무실과 주방이 보이고 높게 뻗은 나무들과 꽃 봉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지 않지만 아담해 보이는 정원도 있다. 룸 보이(Room Boy)라 부르는 로컬 남자아이가 정원 끝에 불이 켜진 방을 가리키며 열쇠와 수건을 건네준다. 침대 매트는 이미 수명을 다 한 것 같다. 매트를 살짝 눌러보니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개의 침대 사이로 작은 테이블과 스탠드가 있고 옷가지를 넣을 수 있는 큰 옷장, 둥근 안테나가 꽂힌 사각형 TV, 샤워기가 달린 화장실도 있다. 아침은 간단한 토스트와 커피가 제공되며 에어컨과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는다. 하룻밤에 30,000루피아(한화 3,000원)를 내기로 했다. 나는 하루에 15,000루피아를 잭에게 주기로 했다. 언제까지 함께 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그러기로 했다. 어두운 노란색 전등을 끼고 침대에 누워 돌아가는 팬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잭은 피곤했는지, 곧바로 곯아떨어졌고 나는 혹시라도 팬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두 눈을 감았다 떴다는 반복하며 발리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금발의 늘씬한 훈남 서퍼들, 팔도 다리도 참 길다. 서핑 보드를 살포시 옆구리에 끼고 해변을 거니는 저들의 모습처럼 나도 그럴 것이라 상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뜨거운 태양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은 검게 그을려 갔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현지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실력은 이제 막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초보자이니 멋진 보드는 언감생심! 내 키보다 한 참은 큰 롱 보드(*서핑 입문에 사용되는 길이가 긴 보드)를 선택해야만 했다. 길이만 길면 괜찮은데 무게까지 상당해 해변으로 나가야 하는 길은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 고행의 길이다. 롱 보드를 고집하는 롱 보더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서퍼들은 실력이 향상될수록 보드의 길이가 짧아진다. 일명 숏 보드(*길이가 짧은 상급자용 보드)!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보드는 9’ 2″ 사이즈의 파이버글라스 소재의 롱 보드, 게다가 보드의 윗면(*데크)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꽃이 그려져 있다. 이쯤 되면 머릿속으로 그렸던 스웩(간지)은 물 건너 간지 오래다. 더욱이 혼자서는 도무지 이 긴 보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해변 모래사장 위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라. 상상만으로도 웃긴데 현실이 되면 정말 웃프다. 내 품에 포근하게 안을 수 있는 숏 보드를 타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섣불리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혹시라도 포기해버리는 일이 생길까 봐.

Laundry

오늘도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들뜬 마음으로 보드를 챙겨 집을 나섰다. 요즘 들어 한층 더 북적이는 바다다. 그러다 보니, 파도 하나를 타기 위해 더욱 큰 소리를 질러야 하고 보이지 않는 치열한 눈치 전쟁을 펼쳐야 한다. 때로는 바다 한가운데서 서로의 목(멱살을 잡아야 하겠지만 물 위에서는 옷을 거의 안 입기에 잡을 곳이 없음)을 잡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방법은 있다. 한적한 서핑 스폿을 찾는 것이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바다를 버리고 조금이라도 혼자서, 행복하게 타 보겠다는 이기적인 마음가짐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한 시간을 넘게 내 달렸다.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도 막히는 교통체증도 이어폰 하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멋진 보텀턴(Bottom Turn)에 도전하겠어, 파도를 기다리며 콧노래도 부르고 파도와 하나가 되겠어.”

 

머릿속은 이미 한참 서핑 중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언제나 완벽하다. 서핑 스폿에 도착해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까만 사인펜을 꺼내 오늘의 목표들을 손등 위에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하게 된 스폿.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상시 10여 명 정도의 서퍼들이 전부였던 나만의 비밀 스폿이 얼핏 보아도 100여 명이 넘는 서퍼들로 가득하다. “What a Hell?, 이게 무슨 황당 시추레이션?”

 

“아무래도 오전 서핑은 그냥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이곳을 자주 찾는 단골 서퍼가 말을 건넸다.
“나 오늘 보텀턴 연습하려고 했어.” 얼굴은 바다에 고정된 상태에서 입만 살짝 열러 대답을 했다.
“난 탑턴(Top Turn),”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작은 테이블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점심을 먹으면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바다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그냥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서핑을 하면서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좋은데, 서핑이 끝나는 걸 기다리는 시간은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까마득히 보이는 서퍼들의 머릿수를 세며 울분을 토하고 있을 무렵, 탑턴을 연습하겠다던 녀석이 자신만이 알고 있는 곳이 있다며 은근슬쩍 꼬시기 시작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애들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어디라도 가서 파도를 타고 싶은 마음에 먹고 있던 바나나 튀김을 바다 멀리 던져 버리고 망설임 없이 보드를 챙겨 바이크에 올랐다.

 

바다는 이미 황금물결로 변해있었다.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바다는 눈이 부실만큼 반짝였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수차례 해안가 모래사장을 넘나들더니 잠시 후, 작은 로컬 보트 한 대가 해변 가까이로 다가왔다. 빨리 넘어오라는 손짓,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빨리 가자!”는 한 마디를 던지고 순식간에 자신의 보드를 작은 파도 너머로 던지고 쏜살같이 몸을 내던졌다. 패들링으로 배가 있는 곳까지 약 2분, 난생처음 배를 타고 떠나는 서핑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트레이닝은 커녕 쉼 호흡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보드를 던졌다. 손 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배까지 다가가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다가갈 만하면 파도가 내처,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놓았다.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미친 듯이 패들링을 했다. 남모를 나만의 도전과는 상관없이 보트는 엔진 시동을 켜고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에 올라탔다. 뱃머리를 돌리기가 무섭게 굉음을 내며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10여 분 남짓 되었을까? 배가 시동을 끄고 바다 한가운데 섰다. 배를 중심으로 우현으로 거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배가 서 있는 곳은 다행히 안전지대(Safety Zone)이다. 능숙하게 보드는 바다에 던져주는 현지 뱃사람들, 함께 배를 타고 온 녀석은 멋진 다이빙을 선보이며 바다로 입수, 던져준 서핑 보드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 갔다.


나는 강력한 아이컨택으로 보드를 던지지 말라는 표현을 했으나, 본척만척 너무나 가볍게 보드를 내 던졌다. 주인이 던져준 장난감을 향해 질주하는 사냥견처럼 날아간 보드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내렸다. 강한 조류에 이끌려 보드는 잡힐 듯 말 듯,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깨가 터져나가도록 두 팔을 저어 필사적으로 보드를 잡았다. 아직 서핑은 시작도 못 했는데 나의 두 어깨는 뻐근함과 함께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갑작스레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름 모를 녀석은 아무 일 없는 듯, 유유히 파도가 부서지는 구역(Zone)으로 향하고 있었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신경 따위는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힘겹게 뒤따라가던 나는 잠시 패들링을 멈췄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파도와는 완전히 다른 크기와 힘이 느껴졌다. 부서진 파도에서는 물보라가 일으킬정도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오전 내내 행복했던 나의 표정과 부드러웠던 몸은 너무나 빨리 굳어져만 갔다. 꿈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이대로 떠내려갈 수도 있고 론드리에 말릴 수도 있다. 서퍼들로부터 들어왔던 공포의 순간을 내가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점점 혼미해져 갔다.

 

“주변에 서퍼들이 도와주겠지, 사람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

 

패들링을 위해 물 밑으로 깊숙이 팔을 넣어 스트로크를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심호흡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라인업에 진입했다. 이제 더 이상의 안전지대는 없다.

 

“정신 바짝 차리자. 이날을 위해 그동안 준비했잖아.”
“휘리릭~”

 

어디선가 들려온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울렁거리는 너울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파도를 알리는 로컬 서퍼의 신호음이었다. 30여 미터 전방의 작은 너울은 잠시 후 작은 굴곡을 형성했다. 20여 미터 전방, 서퍼들은 본격적인 패들링을 시작했다. 작았던 굴곡은 어느새 파도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10여 미터 전방, 움츠렸던 파도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서퍼들도 분주해졌다. 정점(Feak)에서 파도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3미터 전 방, 나는 이미 파도의 힘에 의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파도가 완전히 섰다. 순식간에 피크에 걸려버린 나는 파도를 넘어가기 위해 두 팔과 두 다리를 미친 듯이 저었다. 쓰러뜨리려는 파도와 벗어나려는 인간의 첫 번째 라운드였다.


“여기서 포기하면 떨어져 죽을지도 몰라,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한다.” 순간 첫 번째 파도는 나를 지나쳤다. 파도라는 것이 세트로 움직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두 번째 파도가 10여 미터 앞까지 전진해왔다. 좀 전에 나는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파도를 넘었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번째 파도를 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두 번째 파도를 넘자 세 번째 파도가 어느새 눈 앞까지 다가왔다. 두 팔과 두 다리의 힘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이번 파도는 지난 두 번째 파도보다 더 크다. 힘이 떨어진 이유도 있었지만, 눈으로 봐도 엄청난 놈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믿고 있던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순건 피크(정점)에서 시간이 멈췄다. 나의 서핑 보드가 정점에 정확히 걸린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Panic

빠르게 하강하고 있았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은 얇은 종잇장처럼 펴지고 구겨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런 생각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둔탁한 충격 후, 몸은 바다 안으로 말려 들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물속이다. 숨을 쉬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환한 햇빛이 비치는 수면으로 두 팔을 저었다.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 수면 위를 박차고 올랐다. 폭발할 것처럼 가빠왔던 숨을 고르자마자, 난 다시 파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닷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몸은 다시 엉키고 설키기를 수차례, 파도는 나를 다시 물 밖으로 튕겨 버렸다. 한 번의 심호흡과 함께 또다시 바닷속으로 처박혔다.

 

나는 세 번째 파도에 걸려 아찔한 피크에서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3~4차례의 론드리(*서핑 용어)  끝에 나는 수면 밖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온몸이 전율했고 눈물과 콧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짜디짠 콧물과 눈물을 마시며 생애 첫 론드리를 경험했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고 잔잔해져 있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서퍼들이 서핑을 즐기던 스폿에서 아주 많이 떠내려온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시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홀로 바다에 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급하게 차가워졌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서핑을 하던 곳으로 안간힘을 다해 패들링을 해보았지만 강한 물살과 조류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간힘을 쓰는 사이, 해가 빠르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얼마나 떠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보드의 방향을 돌려 해안가로 나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지만 해안가 쪽은 날카로운 리프들이 가득하다. 발이라도 잘 못 디디면 그대로 베일 수 있다. 서핑 보드에 올라타, 조심스럽게 물의 흐름대로 손을 뻗어 저어나갔다.

 

어두워지는 바닷가, 어렴풋이 보이는 해안가의 불빛을 나침판 삼아 조금씩 두 팔을 저어 나갔다. 물살을 따라 해안가로 떠내려 가던 중, 해안가로 돌아가던 낚싯배를 발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구조를 요청했다. 오후 5시 40분, 이름 모른 녀석을 따라 바다에 들어온 지 정확히 4시간 만에 해변에 도착했다. 따뜻한 모래사장에 두 발이 닿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퍼덕 주저앉았다. 놀란 마음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해안가에 있던 현지인들이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침대에 누어 잠을 청해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코와 귀에서는 바닷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고 늦은 저녁 바에서 만난 서퍼 친구들은 흐르는 콧물의 의미를 이해하듯, 따뜻하게 나를 위로해주며 첫 번째 패닉을 축하해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서퍼’라고 불렸던 날이자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나의 서핑 무용담을 들려준 순간이었다. 비로소 서핑을 시작하게 되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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